THE TRANSLATION OF CULTURES
문화의 번역
― 이토 추타의 실패 ―

가미야 다케오
( 李仲鏞 譯, 2021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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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얼마 전 나는 두 권의 책을 번역해 상재(도서를 출판하는 일)했다. 하나는 앙리 스틸란의 『이슬람의 건축문화』(원서방)이고 다른 하나는 존 브룩스의 『낙원의 디자인, 이슬람의 정원문화』(가시마출판회)이지만, 이 책들이 본론의 주제는 아니다. 여기서 화제로 삼는 것은, 이러한 번역 체험을 통해 느낀, 「건축」을 둘러싼 말의 번역 방법의 문제, 나아가서는 「문화의 번역」이라고 하는 것의 곤란함에 대해서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번역한 『이슬람의 건축문화』의 원제는 “Architecture de l' Islam” 이므로 그 번역은 「이슬람의 건축」 혹은 더 쉽게 「이슬람 건축」이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굳이 『이슬람의 건축문화』라고 한 까닭이다.

외국어로 된 책을 번역하려면, 여러 가지 사전의 신세를 져야 한다. 우선 첫째로 필요한 것은 외국어 사전이다. 『이슬람의 건축문화』는 프랑스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수중에 크고 작은 불화사전과 화불사전을 두었고, 그 중에서도 백수사의 『불화대사전』에는 많은 신세를 졌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일본어에 관한 사전으로 각종 국어사전이나 한화사전 외에 역어를 찾는데 있어서는 가도카와 서점의 『유어신사전』이 큰 도움이 되었다. 널리 말이나 개념의 의미를 확인하려면 평범사의 『백과사전』, 그리고 라루스의 프랑스어 백과사전도 빼놓을 수 없다.

이상의 일반적인 사전 외에, 서양사사전, 동양사사전, 세계사연표, 인명사전, 지명사전, 철학사전, 종교사전, 기타 여러 가지 전문 사전 신세를 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책의 주제에 관한 사전, 즉 《이슬람》과 《건축》에 관한 사전이다. 전자에 관해서는 다행히 몇년 전에 평범사에서 『이슬람 사전』이 출판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이슬람 관계의 학자들이 총력을 기울이고 편찬·집필한 것으로, 현재의 일본에서의 이슬람학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동안 학자에 의해서 뿔뿔이 흩어졌던 용어법과 표기법도 이를 따르고 통일되고 있다. 만약 이 사전과 『불화대사전』이 없었다면, 내 번역은 도중에서 좌절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다.

그런데 후자의 《건축》이지만, 알다시피, 우리 나라 건축계의 총력(선전 문구에 있는) 『건축대사전』이 창국사에서 출간되고 있다. 분명 이 사전이 도움이 됐을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슬람의 건축문화』를 번역하는 데 이 사전은 거의 소용이 없었다.

우습지 않은가, 건축책을 번역하는 데 『건축대사전』이 쓸모 없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건축 관련 단어를 조사할 때 내가 이용한 것은 오히려 신초샤의 『세계미술사전』이었다. 건축 서적의 번역에 있어서, 건축의 말을 조사하는데, 『건축대사전』보다 『세계미술사전』이 도움이 된다고 하는 사실 속에, 「건축」이라는 말을 둘러싼 우리 나라의 특수 사정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특수 사정인지를 이하에 고찰하고자 한다.



II

첫 번째로 쉬운 영작문 문제를 출제해드리고 싶다. 지금 계이궁(가쓰라리큐)과 호류사(호류지)와 이세신궁을 화제로 삼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이들 세 건축은 매우 아름답다.」

라는 문장을 영어로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뭐야 이것은, 마치 중학교 1학년생의 영작문이 아닌가, 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구문으로서는 확실히 그대로이지만, 이것을 올바르게 영어로 사용하는 일본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These three architectures are very beautiful.

라고 번역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건축」은 Architecture 니까, 「이들 세 건축」은 These three Architectures 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맞는 번역은,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다.

These three buildings are very beautiful.

아무래도 Architecture 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면,

These three pieces of architecture are very beautiful.

혹은,

These three works of architecture are very beautiful.

"Architecture" 라는 단어는 Peace (평화) 또는 Music (음악)처럼 추상명사이므로 복수형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건물」을 쓰고 있을 때에는 Three Buildings로 있고, 「건축 작품」이라는 의미에서는 Three pieces of Architecture 또는 Three works of Architecture 로서 Architecture 자신은 어디까지나 단수형으로 이용한다. (" 많은 건축 작품 사례"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Many Architectures 가 아니라 Much Architecture 이다.)

이런 일들은, 해외에서 유학하거나 현지 사무소에 몸 담았던 건축가들조차 종종 틀렸다는 점이다. 요컨데, 영어의 「아키텍처」나 프랑스어의 「아르시테쿠추르」와 일본어의 「건축」이란, 이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Architecture" 라는 단어는 결코 복수형을 취하지 않느냐 하면, 복수형을 취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예를 들어 지금, 이슬람 건축과 불교 건축과 기독교 건축을 화제로 삼고 있다고 하자. 이 때에는, These three Architectures 라고 쓰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의 Architectures 는 타지마할 묘소나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호류지 같은 개별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권의 수많은 건물을 관통하는 건축의 원리와 문화, 예술을 일컬어 Islamic Architecture (이슬람 건축)라 부르며, 마찬가지로 Buddhist Architecture (불교 건축), Christian Architecture (기독교 건축)과 합하여, Three Architectures 이다.

이것으로 「아키텍쳐」와 「건축」과의 차이가, 상당히 보인다. 일본어의 「건축」이라는 말은 「아키텍처」라는 의미로도 이용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오히려 「빌딩」의 의미로, 혹은 동사의 「컨스트럭트」(건설하다)의 의미로 이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Architecture"의 (번)역어는 「건축」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영작문을 할 때에는, 무심코 Architecture를 「건물」의 의미로 사용해 버리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아키텍처」와 「건축」과의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긴 것일까. 「건축」이라는 말은, 『고어사전』을 찾아도 거기에 실려 있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옛부터 일본에 있던 말은 아니다.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에 새로 만들어진 말이다.

우리나라(일본)가 그동안의 쇄국을 풀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시대의 지도자나 학자들이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것은, 이제까지 일본에는 없었던 개념을 수입할 때의 (번)역어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말의 문제일 뿐 아니라, 말을 통해서, 문화의 제도를 수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일본어나 한자어를 억지로 맞추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대응을 할 수 없어서, 종종 새로운 말을 조어할 필요에도 사로잡혔다. 말하자면, 이는 단순한 「언어의 번역」을 넘어선 「문화의 번역」 문제이기도 했다.

의학용어든, 법률용어든, 서양 문화를 번역함으로써, 학문에도 실업에도 곤란하지 않을 정도의 용어 체계를 구축해 왔다. 건축 용어도 그럴 것이었지만, 문화의 번역 과정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역어만이 새롭게 조어되어도, 그 실질이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원어와 역어 사이에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키텍처」와 「건축」의 경우가 그랬다. 「아키텍처」가 문화·예술상의 개념인데 반해, 「건축」은 물리적, 공학적 의미를 갖게 돼버렸다. 그 때문에, 우리 『건축대사전』은 「아키텍처」에 대한 대사전이 아니고, 「건설공학」에 대한 대사전이 돼버렸던 것이다. 내가 번역한 "Architecture de l'Islam" 은, 이슬람의 「빌딩·사이언스」에 대한 서적이 아니고, 이슬람의 「아키텍처」에 대한 서적이므로, 번역에 있어서, 『건축대사전』보다 오히려 『세계미술사전』이 도움이 된다, 라고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일본어에서, 「건축」이라는 말은 「토목」이라는 말과 조합되어, 「토목건축」이나 「토건업자」 등으로 사용된다. 「토목」이라는 단어 또한 「시빌·엔지니어링」의 역어로는 문제가 많은데, 그것은 일단 둔다. 여기에서는 건축이 토목과 조합되어 「빌딩」이나 「컨스트럭션」이라는 의미로 세상에 이용되고 있음을 재인식해두자.

한편 영어로는, "Architecture" 가 주로 조합되는 상대는 "Art" 이며, "Art and Architecture" 라는 구절은 자주 만난다.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과 건축을 묶는 말이니, 이는 「미술, 건축」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조형예술」이라는 역어가 적당할 듯싶다.



III

이렇게 「아키텍처」라는 말이 예술상의 (추상적인) 개념임이 드러나면, 여기에서 또 다른 오해가 생긴다. 그것은, 예술적이지 않은 건물이 「빌딩」이고, 예술적인 건물을 「아키텍처」라고 부르는 거라는 생각이다. 「아키텍처」가 예술상의 개념이긴 하지만, 물리적인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좀처럼 이해되기 어렵다. 아무래도 일본어의 「건축」이라는 말의 의미에 이끌려, 「아키텍처」라는 말의 의미도 오해해 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쇼코쿠샤에서 나온 『건축개론』(신정판)을 펴보면, 오우미에 에이씨가 그 총론에서, 「건축이란 무엇인가」를 솜씨 좋게 해설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 중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오해의 한 예이다.(15쪽)

「금세기 가장 뛰어난 영국의 건축역사학자 중 한 명으로, 근대건축의 전개 과정에서 많은 시사점을 남긴 니콜라우스 페브스너는, 아키텍처 (Architecture) 와 빌딩 (Building) 에 대해, 뛰어난 분류를 보여주고 있다.」

오우미에씨는 이렇게 쓰고 있지만, 페브스너는 아키텍처와 빌딩을 《분류》하거나 하고 있지는 않다. 애당초 이 두 개념은, 분류되는 관계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우미에씨가 인용하고 있는 『유럽건축서설』의 첫머리의 서론을 검토해 보자. (N. 페브스너 지음, 고바야시 분지·야마구치 히로시·다케모토 아오이 옮김, 쇼코쿠샤)

「자전거 보관소도 건물(빌딩)이며, 링컨 대성당(카테드라르)도 하나의 건축(아키텍처)이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닫힌 공간은, 대부분 건물이라고 해도 좋으나, 건축이라는 말은, 미적인 매력을 더하기 위해 설계된 건물만을 말한다.」

이것을 읽어보면, 페브스너는 《분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적인 건물이 「건축」 이며, 미적이지 않은 공간은 단순한 「건물」이다, 라고. 페브스너가 정말 그런 말을 하는지, 원문을 보자.

" A bicycle shed is a building ; Lincoln Cathedral is a piece of architecture. Nearly everything that encloses space on a scale sufficient for a human being to move in is a building ; the term architecture applies only to buildings designed with a view to aesthetic appeal."
“자전거 보관소는 건물이다; 링컨 대성당은 건축물의 한 부분이다. 인간이 입주하기에 충분한 규모로 공간을 둘러싸는 거의 모든 것은 건물이다; 건축이라는 용어는 미적 매력을 고려하여 디자인된 건물에만 적용됩니다.”

여기에서는 「아키텍처」라는 개념이 미적인 건물에 적용된다 (Apply to) 고 말하는 것이지, 물리적 실체로서의 미적인 건물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을, 나라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것이다.

「자전거 보관소는 단순한 건물이지만, 링컨 대성당은 하나의 건축 작품이다. 사람이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둘러싼 것은, 거의 뭐든지 건물(빌딩)이지만, 건축(architecture)이라는 술어는, 미적인 매력을 주기 위해 설계된 건물에 대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

번역자 고바야시씨도, 인용자 오우미에씨도, 「아키텍처」라는 문화·예술상의 추상적 개념을, 물리적인 「빌딩」의 의미로 사용되는 「건축」이라는 일본어와 이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전거 보관소도 건물(빌딩)이며, 링컨 대성당도 하나의 건축(아키텍처)이다.」

와 같은 문장에 위화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음악에 대입하면,

「시보의 사이렌도 음향(사운드)이며, 바흐의 첼로 소나타도 음악(뮤직)이다.」

라고도 말할 것이다. 이 정도면 누구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보의 사이렌은 단순한 음향에 불과하지만, 바흐의 첼로 소나타는 하나의 음악 작품이다.」

라고. 그리고 페브스너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귀의 고막에 감지될 정도의 진동파는, 거의 무엇이든 음향(사운드)이지만, 음악(뮤직)이라는 술어는, 미적인 매력을 주기 위해 작곡된 음향에서만 사용된다.」

라고. 그리고, 작곡된 개개의 음향은, "A piece of Music" (하나의 음악작품, 악곡)이라고 부른다(하나의 건축작품을 "A piece of Architecture" 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음향」과「음악」을 《분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보의 사이렌도, 뛰어난 작곡가가 작곡하면, 그것은 음악작품이고, 어떤 음악작품도 물리적으로 보면, 그것은 음향일 뿐이다. (뛰어난 건축가가 설계하면, 자전거 보관소도 건축작품이 될 수 있지만, 링컨 대성당도 물리적으로 보면, 단순한 건물이다.)

더욱 뒤얽힌 오해의 예로써, 이소자키 아라타씨의「《건축》이라는 형식」(1990년 《신건축》 잡지 연재)이라고 하는 논문을 들어 보자. 9월호의 222쪽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인다. (굵은 글씨 인용자)

「일반적으로 건축은 단순한 유용물의 단계를 넘어선 구축물로 인정되어, 서유럽에서는, 단순한 건물과의 구별이 명확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건축」이「단순한 유용물의 영역을 넘은 구축물」로 정의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단지 실용을 위해서 지어진 건물과 구별된,「예술적인 건물」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예와 마찬가지로,「건축」을, 한정사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역시 물리적인「건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만이 아니라 그의 복잡한 점은, 「건물」과 「건축」의 구별 외에, 또한 괄호 있는 《건축》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괄호가 붙은 《건축》이라는 것은, 1월호의 논문에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용한 「대문자의 건축」 (Architecture with initial A) 과 동의할 생각인데」

라고 한다. 그러나 이 논문을 읽어 보면, 그가 말하는 괄호 있는 《건축》이란, 결국은 「건축의 예술성」 혹은 「건축을 예술로 보아야 하는 건물에 담겨진 설계자의 사상이나 방법」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즉 「아키텍처」라고 하는 게 아닌가. 만약 이 1월호의 이소자키씨의 논문을 영역한다면, 「건축」이라는 말의 대부분은 building 이라고 번역하고, 《건축》은 architecture 라고 번역하면 충분할 것이다.

이소자키씨가 「대문자의 건축」이라든가, 괄호가 붙어 있는 《건축》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건축」(아키텍처)이, 예술적이라는 한정이 붙는다 해도, 물리적인 「건물」, 「구축물」인 것이다, 라고 하는 이해에 서 있기 때문일 뿐이다. 건물에 관한 예술성, 문화적 내용, 담겨진 사상, 등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대문자의」라든가 「괄호 있는」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키텍처」란 「건물」이 아니다. 건물에 담겨진 「예술성」이나 「사상」, 「방법」이야말로, 「아키텍처」라는 말의 의미이다. 결국 이소자키 씨도, 일본어의 「건축」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불필요한 「대문자의」라든가 「괄호 있는」이라든가 하는 한정사를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같은 논문 속의 다음과 같은 문장 또한 그러하다. (굵은 글씨 인용자)

「건축가로서, 구체적인 건축을 구상하고 있는 자신과, 건축 자체를 대상으로 사고하고 있는 자신이 있어서...」

전자의 「건축」이 「빌딩」을 가리키고, 후자의 「건축 자체」가 "아키텍처"를 가리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고바야시씨나 오우미에씨, 이소자키씨 같은, 건축에 정통한 뛰어난 분들도 이러한 오해를 해버린다는 것은 일본어의 「건축」이라는 말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역어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하물며 일반인들이, 「건축」이나 「건축가」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처음에 말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IV

「아키텍처」는, 메이지의 초에는 주로 「조가학(造家學)」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해 「건축」이라는 역어를 확립한 사람이, 대건축가이자, 뛰어난 건축역사가였던 이토 추타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경우, 그것은 그의 명예로서 이야기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그의 큰 실패였다, 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자세히 보기 전에, 일단 「아키텍처」라는 말이 원래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5권은 「철학용어사전」으로 되어 있고, 제1장에서는 「아르케」라는 말이 해설되어 있다. 아르케란, 《사물의 시작, 원리, 시동인》를 말하는 것이다. (『형이상학』, 이와나미문고, 상권)

「사물의 아르케라는 것은 … (5) 움직이는 것들이 그렇게 움직이고, 전화(다른 상태로 바뀜)하는 것들이 그렇게 전화하는 것은 혹자의 의지에 의해서일 때, 이 혹자가 또 아르케라고 불린다. … 여러 가지의 기술(테크네)에 있어서도, 특히 건축 관계의 여러 기술을 지도하는 건축가(아키텍톤)의 술(術; 기법, 기술, 기예, 재주)이, 아르키텍토니케 (Architektonike) 라고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아르키테쿠토니케ㅡ·테크네ㅡ」(여러 (기)예를 통할하는 원리)가, 라틴어의 「아르키테쿠투라(archĭtectúra; 건축, 건축술)」를 거쳐, 프랑스어의 「아르시테쿠추르」나, 영어의 「아키텍처」그 외의 어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토 추타

이토 추타는, 「‘아키테쿠추르’의 본뜻을 논하고 그것의 번역어를 선정해 우리 조가학회의 개명을 원한다」는 유명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토 츄타 건축문헌』 제6권, 용음사, 1937 에서, 현대판명을 쓰기로 함

「『아키테쿠추르』의 어원은 그리스에 있으며, 바르게는 대장도(大匠道; 대 장인의 도)라 번역할 수 있어야 하며, 고등예술이라(는) 번역도 가하다. 하지만 그리스인은 스스로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 로마인으로서 궁전, 사원 등을 설계축조하는 것의 예술로 명명하여, 전하고 오늘에 이르러, 그 일본에 전래되자, 또는 이를 번역하여 건축학이라 하며, 혹은 조가학이라 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이를 공구(학예 등을 깊이 연구함)하는 것이다.」

이 첫머리를 가지고, 그는 「조가학회」를 「건축학회」로 개명할 것을 주장했고, 3년 후에 그것은 실현될 단계에 이르렀다. 그 논지는 이렇다. 「아키테쿠추르」가 하나의 (분)과의 미술인지, 혹은 한 (분)과의 공학인지는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지만, 나로서는, 「아키테쿠추르」는 세상의 이른바 Fine Art 에 속해야 할 것으로서, Industrial Art 에 속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아키테쿠추르」의 역어에 대해서도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이것을 조가학(造家学)이라고 하고, 우리 제국대학 이것을 주장한다. 첫째는 이것을 건축술이라고 하며, 미술가의 일파 이에 따른다」. 그러나, 「아키테쿠추르」의 본뜻은 단순히 「가옥을 축조하는 법」에 있지 않으니, 「조가학회」라는 이름은 좋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키텍쿠추르』의 말은,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굳이 이것을 부회(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하면, 그러므로 이것을 건축술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지당한 이치와 같다.」

이리하여 「건축」이라는 말이 전면에 내세워졌지만, 이것은 그(이토 추타)의 조어는 아니다. 이 논문이 씌어진 메이지 27년까지 널리 유포되었던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토 추타는 『건축』이라는 말을, 정말로 적절한 역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실은 같은 논문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 것이다.

(역어로는) 「그렇다면 건축의 글자는 어떠한가, 그 의미의 망막(茫漠)함 때문에, 이를 조가의 글자에 비하면 오히려 타당한 것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키테쿠추르』의 문자에 처음부터 건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때때로 토목과 상충돌하며, 상혼동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교량에 있어서와 같은 것은 그 예이다. 건축의 글자는 아직 적당한 역자가 아니다.

그는 「건축」이라는 역어를 적절하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가 올바른 역어라고 생각한 것은, 이 논문의 첫머리에 있는 「대장도(大匠道)」 또는 「고등예술」이었다. 그 자의(字義; 한자의 뜻)의 타당성은, 조금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설로 명확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건축」이라는 역어로 타협하고 만 것이다. 「세우다, 쌓다」라고 하는 의미의 「건축」이라는 말은, 「컨스트럭션」의 역어이기는 해도, 「아키텍처」와 이퀄로 연결할 수 있을리도 없었지만, 그러나 「조가」든 「건축」이든의 말이 넓게 이용되고 있는 이상, 그것들을 뒤집어 「대장도(大匠道)」라고 하는 새로운 조어를 세상에 인정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라고 생각한 것일 것이다. 적어도 「조가」보다는 낫다(라고 생각되었던) 「건축」이라는 역어로 타협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이토 추타의 커다란 실패였다. 그 후의 「건축」을 둘러싼 말의 혼란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건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건축가」의 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그것은 큰 장해(障害)가 되었다.

단지, 하나 이토 추타의 변호를 해 둔다면, 그는 「아키테쿠추르」의 역어로서, 사실은 「건축」이 아닌 「건축술」의 말을 선택했던 것이다. 만약 그대로의 역어가 보급되어 있으면( 「미술」이나 「예술」과 같이), 「아키텍처」가 물리적인 「건물」을 가리킨다는 오해는,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졸역서의 제목을 『이슬람의 건축문화』라고 했는데, 거꾸로 「건축문화」라는 말은, 영어로는 뭐라고 할까.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Architectural Culture" 라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영어책을 읽다가 이런 말을 만난 적은 거의 없다. 프랑스어로 "Culture Architecturale" 라는 단어를 만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런 식의 말투는 필요치 않고, 「아키텍처」라는 말은 처음부터 「건물에 관한 예술, 문화」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까, 「건축문화」의 역어는 "Architecture" 의 한 단어로 충분한 것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브루노 타우트의 유명한 『건축예술론』(1948, 이와나미서점)이라는 책이다. 이 제목은, 노다 도시히코의 《건축비예술론》(1914, 《건축잡지》)과의 유사함으로 인해, 「건축은 예술이다」를 논한 책으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유럽인인 타우트에게, 건축이 예술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에, 그런 걸 굳이 증명하려고 한 건 아니고, 「건축이란 어떤 예술일까」를 탐구한 책이다. 「건축이란 어울림의 예술이다」라고.

建築芸術論

원래 이 책의 원제는 "Architekturlehre" (건축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 시노다 히데오씨는 이를 『건축예술론』이라고 옮겼다. 일본에서는 「건축」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건물」이나, 공학적인 「건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책은 「건설공학」에 관한 논고가 아니므로, 「건축론」보다 「건축예술론」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가 "Architecture de l' Islam" 을 『이슬람의 건축문화』라고 번역한 것도 그것과 똑같고, 「예술」과 「문화」 중 어느 쪽에 역점이 놓여 있느냐에 따라, 「아키텍처」를 「건축예술」로 번역하거나, 「건축문화」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제목 정도면 괜찮지만, 끊임없이 「건축예술」이나 「건축문화」로 번역할 수는 없다. 통상은 아무래도 간단하게 「건축」이라고 번역해 버린다. 그리고는 「건물」이라든가 「건설」이라는 의미에서는 결코 「건축」이라는 말을 쓰지 않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잔꾀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큰 장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건축기준법』이다. 이 법률에서는 단어의 정의가 되어 있고, 제2조, 제13항에 "건축"이라는 말의 정의로서,

「건축물을 신축, 증축, 개축, 또는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라고 씌어 있다. 이것이 국가가 정한, 「건축」이라는 단어의 정의이다. 이에 따라 세상에서는, 건축, 신축, 개축, 증축, 건축업, 건축전문가(가게), 건축회사, 건축자금, 건축확인, 건축면적, 위반건축, 내화건축, 건축해체업, 이라는 일련의 단어의 용법이 정착하고 있으니, 「건축」이라는 단어가 「아키텍처」가 아니라, 「빌딩」이나 「컨스트럭션」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건축가」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될 리 없다. 그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키텍트」이기보다는 「빌더」이니까. 게다가 「건축사」라는 구별 등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워, 최근에는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 전체를 가리켜 「설계사」라는 말이 유포되어, 스스로 그렇게 자칭하는 사람도 나와 있을 정도이다. 「건축」이나 「건축가」를 둘러싼 말의 혼란은, 확대일로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아키텍처」에 대한 역어로 「건축」의 단어가 서투른 것이라면, 어떠한 역어가 바람직한 것일까. 이토 추타는 '대장도(大匠道)'라는 조어를 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또 「철학」 등 많은 조어를 만든 니시 아마네는 『미묘*학설』(메이지 10년) 중에서 「공장술(工匠術)」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공장(工匠)」이란 목수나 직공을 가리키는 말이니까 사정이 마땅치 않을 것이다. (이토 추타의 '대장도(大匠道)'라는 것은 이 점을 감안한 조어였다고 생각된다.) * 美妙(미묘) : 아름답고 묘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움.

「아키텍처」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여러 예도(기예)의 원리」라면, 나라면 「원술(原術; 근본 기예)」라고 번역했을 것이다. 「건축」이라고 하는 역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므로, 「원술」이라고 하는 말은 기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예술」이나 「환술(요술)」이라고 혼동하기 쉽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원어의 의미 자체는 상당히 올바르게 전하고 있으며, 물리적인 「건물」과 혼동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원술」이라면 건물의 원리뿐만 아니라, 조선(造船; 배를 설계하여 만듦)의 원리 (Naval Architecture) 나, 조경의 원리 (Landscape Architecture), 그리고 컴퓨터의 원리도 「아키텍처」라고 부르는 것에 납득이 가는 것이다.



V

이상으로 고찰한 것과 같은 우리나라(일본)의 현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있다.

그 첫 번째는, 현상 긍정이다. 「건축」이라고 하는 말은, 지금까지대로 「빌딩」이나 「컨스트럭션」의 의미로 사용되는대로 놓아 둔다. 가령 일본에서의 「건축」을 둘러싼 언어나 제도가 구미(유럽과 미국)와 다르더라도, 일본에는 일본의 독자적인 제도가 있으면 된다, 라고 하는 생각이다. 「아키텍처」나 「아키텍트」라는 개념이나, 거기에 관련되는 제도는 유럽의 문화일 뿐이니까, 그 「직역 문화」를 일본에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라고 하는 생각이며, 건축가의 본연의 자세도 「건축사법」도, 지금과 같이 좋다고 하는 태도이다.

제2의 길은, 서양에서 확립된 「건축문화」를 우리나라에도 올바르게 정착시키기 위해서, 「아키텍처」의 역어를, 새롭게, 더 정확한 것으로 다시 정하고자 하는 길이다. 예를 들어 그것을, 먼저 제시한 「원술(原術)」이라고 하는 역어로 다시 정한다고 하면, 「건축」이라고 하는 말은 제일의 이치와 같이 「빌딩」이나 「컨스트럭션」의 의미대로 해 두고, 그 대신에, 건축가는 건축가라고 자칭하는 것을 그만두고 「원술가」라고 자칭하는 것이다. 일본건축가협회는 「일본원술가협회」로 개칭하고, 대학의 역사학 강좌명은 「서양원술사」나 「일본원술사」로 변경한다. 졸역서 『이슬람의 건축문화』도, 『이슬람의 원술문화』, 또는 단순히 『이슬람 원술』로 제목을 바꾼다.

그리고 모든 언론사에 통고를 하여, 현재의 「건축」이라는 단어를 문화적, 예술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경우에는, 이 이후에 반드시 「원술」이라고 써 달라고 의뢰해야 한다. 또한 모든 영일사전 등에는 "Architecture" 의 역어를 「원술」로 고쳐야 하며, 국어사전 등에는 새롭게 「원술」이라는 항목을 설정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아키텍처'라는 문화의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제3의 길은, 「건축」이나 「건축가」라고 하는 말이 「아키텍처」나 「아키텍트」의 역어로서, 모처럼 여기까지 정착해 온 것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기 때문에, 반대로 그런 뜻이 아닌 사용법을 배제해 나가려는 방식이다. 「건축」이라는 말은, 「아키텍처」의 의미 이외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빌딩」을 지칭할 때는, 반드시 「건물」 또는 「건조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건축물」이라는 단어도 좋지 않다. 「건축주」는 「건설주」가 낫다.)

또 「건축」에 「하다」를 붙여 동사화한 경우에도, 그것은 「짓다/세우다」, 「건설하다」를 의미하게 해서는 안 된다. 「건축(아키텍처)하다」라는 것은, 「설계 행위를 시행한다」라든가, 「건축의 문화, 예술에 대해 사색한다」라는 의미여야 한다. 아울러, 이런 용어를 정착시키려면, 보도기관(언론)뿐만 아니라, 널리 여러 언론사에 개명 신청을 하고,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우선 「일본건축학회」는 「일본건설학회」라고 개칭한다. 각 대학의 「공학부 건축학과」는 「공학부 건설학과」로, 「건축회사」는 「건설회사」로, 「건축업협회」는 「건설업협회」로 고쳐달라고 한다. 출판 관계에서는, 쇼코쿠샤의 『건축대사전』은 『건설대사전』으로, 『건축학대사전』은 『건설학대사전』으로, 잡지의 《건축기술》이나 《건축지식》은 각각 《건설지식》으로 명칭을 변경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축기준법』을 『건설기준법』으로 고쳐, 제2조의 「용어의 정의」를 완전히 개정받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1급 건축사」는 「1급 건설사」로 이름을 바꿔, 「건축가」와는 확연히 다른 자격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일급 건설사」의 영어 번역은 "First class Architect" 가 아니라 "First class Builder" 이다. 『건축사법』을 『건설사법』으로 고침과 동시에, 새로 『건축가법』을 제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들 세 갈래 길 모두, 채용하기 어렵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 첫 번째 길이 가장 안이하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가협회가 요구하는 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길은 가장 정공법이기는 하나, 새로운 역어의 선정 및 확립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세 번째 길은, 얼핏 타당해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사회의 저항이 더 크지 않을까. 그리고 또, 만일 그것이 어느 정도 잘 되었다고 해도, 「아키텍처」의 역어를, 「짓다, 쌓다」라고하는 한자로 이루어진 「건축」이라고 한 채로는, 이토 추타의 실패는 그 후에도 더욱 계속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보유》
(빠진 것을 보충하는 부분)

「아키텍처」라는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예문을 볼 때에,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건축역사가 조지 미셸이 페마양체 사원에 대해 해설하고 있는 글이다. (George Michell : The Penguin Guide to the Monuments of India, vol.1, p.249, 밑줄 인용자)

The complex consists of a main prayer hall surrounded by a school, a kitchen and residences. The architecture of the buildings is typical of the eastern Himalayas, with painted masonry walls overhung by steeply gabled roofs; the doorways and windows are surrounded by brightly coloured bands."
(“단지는 학교, 부엌 및 주거로 둘러싸인 메인 기도 홀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건축은 히말라야 동부의 전형으로, 가파른 박공 지붕에 그려진 석조 벽이 겹쳐져 있다; 출입구와 창문은 밝은 색상의 띠로 둘러싸여 있다.”)

밑줄 부분을 번역하는데, 현재 보통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어법으로 하면,

「이들 건축의 건축은, 동부 히말라야 지방에 전형적이다.」

는 것이 되는데, 이래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번역문이라면,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이들 건물의 원술(原術)은 동부 히말라야 지방에 전형적이다.」

architecture 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건물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건물에 깃든 방법과 표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현대의 일본어로는, 「이 건물들의 디자인은, ...」 이라고 말하지만, 「원술(原術)」(아키텍처)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형태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문화의 총체를 의미하고 있다.

또 프랑스 대혁명 시대의 건축가, 불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Les Architectes de la Liberté" p.11, 밑줄 인용자)

C'est cette production de l'esprit, c'est cette creation, qui constitue l'architecture, que nous pouvons, en consequence, definir l'art de produire et de porter a la perfection tout edifice quelconque."
(“이것은 정신의 생산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축을 구성하는 창조물이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떤 건물이든 무엇이든 생산하고 완성하는 예술을 정의한다.”)

이 글의 밑줄 부분을 단독 문장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보통의 용어법에서는,

「건축이란, 어떤 건축이든, 그것을 생성시켜, 완전히 완성시키는 예술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을 「원술」이라는 단어를 써서 옮기면,

「원술(原術)은, 어떤 건물이든, 그것을 생성시켜, 완전히 완성시키는 예술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물리적인 존재로서의 「건물」(에디피스)에 내재하는 예술, 방법이 「원술(原術)」(아르시테쿠추르)인 것이다.

한편, 현대 일본어에 있어서 「건축」이라는 말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신문의 투서란에서의, 어느 건축가의 문장을 싣는다. (아사히신문, 1991년 3월 6일 조간, 굵은 글씨 인용자)

「건축업계에서는, 설계가 끝나도 시공자가 정해지지 않고, … (중략) … 세금대책으로 건축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땅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축비용을 싸게 느끼고, 코스트(비용)에 둔감하다. 이런 실수요가 아닌 붐을 타고, 건축비도 치솟았다. 업자들이 이윤을 내기 쉬운 공사로 달려가는 것은 탓할 수 없지만, 평균 원가 상승으로, 영세 건축주의 작은 빌딩이나 주택에 악영향이 나오기 시작했다. 치솟은 땅값에 건축비가 연동돼버린 것이다. 불요불급한 건축을 삼가는 것 이외에, 자영 수단은 없겠지만 땅값과 건축비의 상승이라는 더블 펀치로 … (후략).」

짧은 문장 안에, 「건축」이라는 단어가 총 8개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건설」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아키텍처」의 의미로 이용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투서의 주인은 일본건축가협회 회원의 건축가이다. 건축가 자신이 「건축」이라는 말을 이렇게 이용하고 있으니, 일반인이 「건축」을 아키텍처의 의미로 이해할 리가 없는 것이다.

( 「 文化の翻訳 ― 伊東忠太の失敗 ― 」 1990 -91年冬 執筆、
デルファイ研究所 『 at 』 誌に掲載、 1992年 11月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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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av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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