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라의 석굴사원군 |
가미야 다케오
(朴鍾和 譯)
자이나교의 개조 마하비라는, 기원전444년경(*1)에 동인도 즉 현재의 비하르주의 바이살리 가까이에서 탄생하였다. 이것은 불교의 개조인 부처와 같은 시대 그리고 같은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두 사람 모두 같은 <크샤트리야>(무사)계급의 왕족 출신이다. 마하비라 쪽이 약간 연장이며 두 사람은 서로 상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만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마하비라는 30세, 부처는 29세에 출가하여 사문(沙門)이 되어, 전자는 12년간의 고행 후에, 후자는 6년간의 고행과 명상 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자이나교와 불교라는 두 개의 새로운 종교가 인도에 탄생하게 되었지만, 당시는 그 밖에도 막칼리·고살라(Makkhali Gosala)가 개창(開創)한 아지비카교(Ajivika敎) 등 다양한 신흥 종교나 새로운 철학이 탄생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 주요한 것을 불전에서는 「6사외도(6師外道)」라고 부르고 있다. 즉 부처 외에 6명의 유력한 사상가가 각각 도(道)를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니간타·나타풋타라고 불리는 사람이 마하비라이다. 그의 통칭은 「나타족 출신으로서 속박을 벗어난 사람」이란 의미이고, 본명은 발다마나라고 한다. 마하비라라고 하는 것도 「위대한 영웅」이라는 의미의 존칭으로서 한역불전(漢譯佛典)에서는 <대웅(大雄)>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또한 자이나교에는 <耆那敎>라는 한자가 쓰여진다). 그 때까지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는 베다문헌을 지상(至上)으로 하는 브라만교였다. 이것은 사람들을 네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그 최상위의 <브라만>(사제계급)만이 신과 교통할 수 있다고 하여 브라만에 의한 신들에 대한 공양을 중심으로 하는 제식종교였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기원전 5세기에 출현한 6사외도 등의 자유사상가 무리이었다. 마하비라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또한 동물을 죽여 신에게 희생물로 바치는 공양을 심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또 세계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물의 「창조신」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무신론의 종교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이나교는 불교와 닮는 점이 많으므로 양자는 형제간의 종교라고도 불린다. 양자의 큰 차이점은, 자이나교에서는 철저한 「고행」에 의해서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하는데 반하여, 불교에서는 고행을 부정하여 고락의 「중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고행주의와 철저한 비살생의 계율, 그리고 또 중앙집권적인 교단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자이나교는 인도사에 있어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는 일도 없었고 또한 인도의 외부로 나가는 일도 없었다.
![]() 한편 불교는 고대인도에서는 브라만교를 대신하여 지배적인 종교가 되있고, 또한 토착성을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또 그 때문에 브라만교의 발전형태인 힌두교나 외래의 이슬람교에 의하여 쇠퇴하여 13세기에 이르러서는 인도에서 종적을 감춰 버리게 된다. 자이나교는 성쇠를 반복하면서도 인도 국내에서 계속 유지되어 1981년의 국가통계에서는 약 320만명의 신자를 헤아린다. 7억이라는 인구로부터 본다면, 이것은 국민의 약 0.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의 존재감은 역사상에 있어서도 현재에 있어서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물론 소수파이기 때문에 건축사에 있어서는 불교나 힌두교를 추종하는 일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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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인도건축은 지배계급과 유착된 불교가 주도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그 대개가 불교의 것이고, 자이나교의 것이 약간 남아 있으며 브라만교의 유적은 전무에 가깝다. 가장 고대적인 조형은 <스투파(Stupa)>이다. 부처의 사후에 그 유골(불사리)를 나누어 각지에 분산시키고, 이것을 흙무덤 형태로 돌이나 벽돌로 덮어 예배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서, 자이나교의 스투파에 대한 기록도 있지만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산치(Sanchi)를 비롯하여 거의가 불교에 속한다. 스투파는 중국에 전달되면서 <卒塔婆>라고 음역되어 <탑파>라고 약칭되고 한국, 일본에서는 단지 <탑>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5층답이나 7층탑 등의 고층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부터 영어 Tower의 번역어에도 탑이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의 <스투파>(탑)에는 고층이라고 하는 의미는 없었다. 한편, 출가한 스님들 중에는 속세를 떠나 동굴에 사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연적인 동굴이던 것이 후에는 인공적으로 동굴이 굴착되게 된다. 이것이 세계에서도 유명한 인도의 「석굴사원」의 기원이다. 석굴은 인도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고대의 페르시아에서도 이집트에서도 보여지고 또한 인도의 영향으로 중국에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도만큼 석굴을 고집하여 고도한 건축적 형식을 발전시킨 곳은 그 외에는 없다. 인도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가장 큰 놀램은, 그 규모이든 아니면 그 밀도이든지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석굴사원군에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석굴이 현대의 우리에게는 경이이기는 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는 돌을 쌓아 세우는 것보다도 바위산을 쪼아 만드는 편이 편하였을 것이다. 하나의 통일된 설계에 의거하여 채석장에서 돌을 잘라내고 현지까지 운반하여, 그것들을 조각한 뒤에 헝크러짐 없이 쌓아 올려 건물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고도의 기술과 비용이 필요한 것이다. 불교의 석굴사원은, 스투파를 숭배하여 예배의 장소로 하는 <차이티야(Chaitya)굴)>과 승려들이 사는 <비하라굴>로 분류된다. 후자가 실용 본위로 만들어지는 데 대하여, 전자는 높은 천장과 풍부한 장식으로 만들어진다. 그 볼트형(vault)의 천장에는 종종 돌이나 나무로 만든 리브(rib)가 붙여지거나,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당시의 사원건축을 모방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석굴이라고 하는 바라발 언덕의 로마스·리시굴(기원전 3세기)는 불교가 아니라 아지비카 교도를 위한 것인 것 같다. 아지비카교는 「6사외도」의 하나로서 당시에는 유력하였지만 후에는 자이나교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는 입구가 아치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물론 진정한 아치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무나 대나무를 구부려 아치모양으로 한 건물의 흉내였을 것이다. 실내의 벽은 평평히 마무리되어 있어 조각이나 장식은 없다.
![]() 기원전 2세기에는 아잔타를 비롯한 불교굴이 속속 개굴되어, 약1,200을 헤아리는 전 석굴사원의 75퍼센트를 불교굴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뭄바이 동쪽의 카를리(Karli)에 있는 차이티야굴이다(2세기). 배치는 전후방이 원형(圓形)으로 주회랑과 측회랑을 나누는 2열의 기둥이 나란히 서고, 반원의 중심부에 스투파가 조각되어 있다. 각각의 기둥의 두부(頭部)에는 쌍으로 된 남녀의 앞모습이 조각되어 이 석굴 전체에 상큼한 기념성(記念性)을 부여하고 있다.
자이나교의 가장 오래된 사원은 부바네슈와르로부터 가까운 칸다기리와 우다야기리의 언덕에 있는 석굴사원군으로서 기원전 1세기에 개굴되었다. 5세기가 되면서 힌두교의 석굴사원이 개굴되기 시작한다. 거기에서는 신이나 신화의 인물들이 다이나믹하게 조각되어, 정적인 불교굴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아잔타에서 남서로 100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엘로라에 있는 석굴사원군이다. 여기에는 34개의 석굴사원이 2킬로미터를 넘게 한 줄로 늘어서 있는데, 그 제1∼12굴이 불교굴, 제13∼29굴이 힌두굴, 제30∼34굴이 자이나굴로서 3종교가 서로 반목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종교적 관용성이 현재는 없어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은 시대적으로는 서로 약간씩 틀려 불교굴이 7∼8세기, 힌두굴이 7∼9세기 그리고 자이나굴이 8∼10세기에 개굴되었다. 시대가 늦은 것만큼 자이나굴의 내부공간은 가장 섬세하고 화려하며 규모는 작지만 변화가 풍부하고 밀도가 높은 공간을 보여 준다.
![]() 그러나 엘로라에서 가장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은 힌두교의 카일라사 사원(제16굴)이다(8세기). 이것은 이미 동굴이 아니라, 바위산을 위에서 굴착하여 마치 돌을 쌓아 세운 것 같은 독립 사원을 통째로 조각하고, 또한 그 내부를 뚫어 성실로 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차이티야굴 속에 있었던 독립 스투파의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각을 좋아하는 인도인은 점차 동굴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조각적인 외관의 건축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동굴이 아니므로 이것을 「석굴사원」과 구별하여 「석조사원(石彫寺院)」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 ![]() 힌두의 뒤를 좇고 있던 자이나는, 여기 엘로라에서도 초타·카일라사(소카일라사)사원 이라고 불리는 제30굴에서 석조사원을 만들고, 또한 제32굴의 중정에는 자이나교의 독자적인 <차투르무카(Chaturmukha)>(사면개방) 형식의 비마나를 만든다(9세기). 후일의 자이나 건축의 토대가 되는 이 형식은, 여기에서는 단순한 원형(原形)이 멋있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힌두의 카일라사 사원보다 훨씬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이 석조의 건물은 주위의 석굴사원과 어울려 훌륭한 조화적 공간을 현출시키고 있다.
![]() 엘로라의 자이나굴 평면도(제31∼34굴) 그런데 인도의 중세 사원의 원형은, 성실(가르바그리하)와 그 전실홀(만다파)의 2요소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사원의 1단위라고 생각하면, 이 엘로라의 자이나 사원은 전부 10단위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중정을 둘러싸 2층으로 되고 또한 서로 내부에서 통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여러 방을 돌아 다니면 다른 석굴사원에서는 보이지 않는 변화가 풍부한 공간의 시퀀스를 체험하게 되어 실로 매력적이다.
그 인상은 전장의 아부산 사원과 같이 밀도가 높고 작은 스케일의 내부공간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매우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내부를 걷고 있는 중에 방향감각을 잃어 버려 마치 미로와 같은 성향을 나타낸다. 그 원인의 하나는, 이들 10단위의 사원군이 처음부터 통일적인 전체 계획에 의해서 개굴된 것이 아니라 그 때마다 하나씩 부가되도록 개굴되어 갔기 때문에, 각 단위는 각각 좌우대칭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더라도 군으로서의 전체상이 존재하지 않는 점에 있다. 그것도 또한 전장의 아부산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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